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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1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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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제1제국은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성립된 군주제 국가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유럽 대륙을 지배하며 번영을 누렸으나, 영국과의 대립, 이베리아 반도 침공, 러시아 원정 실패 등을 겪으며 쇠퇴했다. 1814년 나폴레옹의 퇴위와 엘바 섬 유배로 붕괴되었으나, 1815년 백일천하를 거쳐 워털루 전투 패배 후 완전히 멸망했다. 나폴레옹은 내정에서 나폴레옹 법전을 통해 근대 법체계를 정립하고, 공교육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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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1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랑스 국기
국기
프랑스 제국의 문장
제국 문장
국호프랑스 제국
로마자 표기Empire français (프랑스어)
수도파리
국가 모토자유, 공공 질서 (Liberté, Ordre Public)
국가문출의 노래 (Chant du départ)
비공식 국가제국의 구원을 보장합시다 (Veillons au salut de l'Empire)
정치
정치 체제보나파르트주의 절대 군주제 (1804년–1814년)
보나파르트주의 반 입헌 군주제 (1815년)
황제나폴레옹 1세
의회의회
상원보수 세나투스 (1814년까지)
귀족원 (1815년 4월 22일부터)
하원입법부 (1814년 6월 4일까지)
대의원 (1815년 4월 22일부터)
역사
성립헌법 채택 (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 대관식1804년 12월 2일
틸지트 조약1807년 7월 7일
러시아 침공1812년 6월 24일
퐁텐블로 조약1814년 4월 11일
멸망백일천하 (1815년 3월 20일 – 7월 7일)
통계
인구4,400만 명 (1812년)
면적2,100,000 제곱킬로미터 (1812년)
통화
통화프랑스 프랑
기타
국가 코드생략
공용어프랑스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루터교
칼뱅주의
유대교
지도자 칭호황제
통치자나폴레옹 1세
존속 기간1804년 5월 18일 – 1814년 4월 4일, 1815년 3월 20일 – 7월 7일
이전 국가프랑스 제1공화국
이후 국가프랑스 왕국

2. 역사

1799년 브뤼메르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총재정부의 총재 중 한 명인 엠마누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은 입법 의회를 해산하고, 나폴레옹, 시에예스, 로제 뒤코를 임시 통령으로 하는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나폴레옹은 헌법 8년을 초안하여 제1통령에 선출되었고, 헌법 10년을 통해 종신 제1통령이 되면서 프랑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9]

마렝고 전투(1800년 6월 14일) 이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에서 점차 권위를 확대하여 피에몬테, 제노아, 파르마, 토스카나, 나폴리를 병합하고 치스알피나 공화국에 추가했다. 또한 1801년의 정교 조약을 통해 교황의 권위를 통제하려 했으며, 유기 조항(1802년)을 발표하여 교황청의 법적 보호자가 되려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 식민지적 열망을 자극하여 영국의 질투를 악화시켰고, 새로운 부르주아지와 옛 귀족의 융합을 통해 통치 엘리트를 확보했다.[9]

1802년 5월 12일, 프랑스 트리뷴은 종신 통령직에 대한 만장일치 투표를 진행했고, 이는 입법 의회와 국민투표를 통해 확인되었다. 1802년 8월 2일, 나폴레옹은 종신 통령으로 선포되었다.[10][11]

1803년, 독일 전역에 친혁명적 정서가 확산되면서 바이에른 선제후국, 뷔르템베르크 공국, 바덴 변경백국이 프랑스 편에 섰다. 윌리엄 피트 더 영거는 나폴레옹에 맞서 영국-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을 다시 호소했다.

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은 상원으로부터 "프랑스 황제" 칭호를 받았고, 1804년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엄숙히 대관되었다.

나폴레옹은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승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한 후, 남부 독일에 바이에른 왕국,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 작센 왕국 등의 종속국을 건설하여 라인 동맹으로 재편성했다. 또한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하고 안코나베네치아를 병합하는 등 제국의 확장을 지속했다.

1806년 8월 6일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황제 칭호를 포기했고,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대를 격파하고, 아일라우 전투와 프리드란트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여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영토의 약 절반을 떼어내고, 바르샤바 공국을 수립했으며, 프로이센에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다.

1807년 12월 17일 밀라노에서 두 번째 봉쇄령이 발효되면서,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와 갈등을 겪었고, 반도 전쟁에서 스페인을 장악하려 했으나, 스페인 국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1809년 4월 10일 오스트리아가 다시 전쟁을 일으켰으나, 바그람 전투에서 패배하고 쇤브룬 조약을 체결했다.

1810년에서 1812년 사이에 나폴레옹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이혼하고 파르마 여공작 마리 루이즈와 결혼하여 아들 나폴레옹 2세를 얻었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대패하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1814년 3월 30일 파리가 함락되고, 1814년 4월 11일 퐁텐블로에서 나폴레옹이 퇴위하면서 제국은 잠시 붕괴되었다.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1815년 잠시 왕위를 되찾았으나(백일천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어 1821년 사망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부르봉 왕정이 복고되고, 나폴레옹의 정복지는 빈 회의에서 처리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들의 공통된 우려 사항에 호소하여 지지를 얻었다. 여기에는 망명 귀족에 대한 반감, ''앙시앵 레짐'' 복귀에 대한 두려움, 혁명을 되돌리려 했던 외국에 대한 혐오와 의심,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적 이상을 확대하려는 자코뱅의 열망 등이 포함되었다.

나폴레옹은 권력과 제국의 지위를 얻어 프랑스 제도의 변화에 대한 지지를 모았다. 그 예로, 프랑스 가톨릭 교회를 다수 종교로 확정하고 일부 민사적 지위를 회복시킨 1801년의 정교 조약이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시기에 스스로를 계몽 군주로 생각했다. 그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면서 혁명의 수많은 사회적 성과를 보존했다. 그는 효율성과 힘을 숭배했으며 봉건주의, 종교적 편협함, 시민 불평등을 혐오했다.

혁명 초기에 실용주의적 이유로 급진 정치 자코뱅을 지지했지만, 나폴레옹은 정치 경력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독재적으로 변해갔으며, 권력을 잡은 후에는 공교육, 프랑스 법률 시스템의 전반적인 자유주의적 재구조화, 유대인 해방 등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특정 측면을 모두 수용했다. 반면 선거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는 거부했다.

2. 1. 프랑스 제국의 성립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1804년 5월 18일 원로원 결의에 따라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에 즉위하여 "프랑스 제1제국"이 성립되었다.[9] 11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찬성 3,572,329표, 반대 2,569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황제 즉위가 추인되었다.[9] 12월 2일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9] 나폴레옹 1세는 프랑스 황제로서 교황 비오 7세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황제관을 썼다.

나폴레옹 1세의 제국 표준


나폴레옹 정권은 통령 정부 시대부터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한 군사 독재 정권이었으며, 나폴레옹의 존재와 그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정권 존속의 절대 조건이었다.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유럽 열강의 입장에서 프랑스 제국의 성립은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였으며, 혁명이 자국에까지 미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동시에 군사적인 위협도 증가하였다. 열강 각국은 조속히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 제국에 대항하였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통해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정을 세운 것에 역행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친자코뱅파의 반발을 불러들였다.[9]

2. 2. 프랑스 제국의 번영

“나폴레옹의 즉위식 풍선”. 나폴레옹의 군사적 승리 모습을 담고 있다.


프랑수아 제라르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그랑 다르메(Grande Armée)를 기리기 위해 명령한 개선문은 프랑스 제1제국 시대에 파리에서 건설이 시작된 여러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전에 나폴레옹 1세가 근위대를 사열하는 모습


아이라우 전투 이후, 1807년


나폴레옹 1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세계 제일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에 대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가구의 새로운 계산법(짝수법, 홀수법)을 마련하고,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광장과 회관,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 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또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워지고, 교량이 건설되었다.

1805년 나폴레옹 1세는 아미앵 조약을 파기한 영국을 침공하고자 도버 해협에 인접한 불로뉴쉬르메르에 군대를 집결시켰으나, 영국의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군이 바이에른을 공격하자 라인강 방면으로 보냈다. 프랑스군은 곧바로 을 함락시키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과 충돌하였다(아우스터리츠 전투). 나폴레옹 1세의 교묘한 작전 덕분에 프랑스군은 완승을 거두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 1세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다.

다음 해, 나폴레옹 1세는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독일의 서남쪽 나라들을 합쳐 친프랑스 성향을 띤 라인 동맹을 성립시켰다. 더불어 독일 황제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사임하여, 오스트리아 황제가 되었다. 제3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낡은 신성 로마 제국의 잔재를 쓸어버리고 남부 독일에 바이에른 왕국, 바덴 대공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 작센 왕국 등의 종속국을 건설하여 라인 동맹으로 재편성했다. 1805년 12월 26일에 체결된 프레스부르크 조약은 오스트리아로부터 막대한 영토 할양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냈다.

위성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친척들을 여러 유럽 국가의 통치자로 임명했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오래된 유럽 군주 가문과 결혼하기 시작하여 많은 국가에 대한 주권을 얻었다.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는 나폴리의 몰락한 부르봉 왕가를 대신했고,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바타비아 공화국에서 형성된 네덜란드 왕국의 왕위에 올랐으며, 매형 제국 원수 요아킴 뮈라는 베르크 대공이 되었고, 막내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뷔르템베르크 왕의 사위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왕이 되었으며, 양자 외젠 드 보아르네는 이탈리아 부왕으로 임명되었고, 양녀이자 사촌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는 카를, 바덴 대공의 아들과 결혼했다.

프랑스의 패권이 독일에까지 미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도 이를 지지하여 1806년에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러시아 두 나라를 상대로 전쟁상태에 돌입하였다. 베를린을 크게 포위하는 형태로 프로이센군과 대치한 프랑스군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의 승리로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프랑스군이 러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폴란드를 거칠 수밖에 없었는데, 폴란드인들의 협력을 구하고자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영토 분할로 인해 와해된 조국을 재건시켜주겠노라 약속하였다. 1807년 아일라우 전투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함으로써 마침내 러시아를 굴복시키게 된다. 나폴레옹 1세와 알렉산드르 1세는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이미 프랑스의 세력하에 있던 폴란드를 바르샤바 공국으로 분립,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지정하였다. 또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대폭 빼앗아, 이들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나폴레옹 1세는 이 날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개선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전쟁을 종결시키고 두 제국 사이에 동맹을 시작했는데, 이는 유럽의 나머지 국가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 제국은 분쟁에서 서로를 돕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러시아를 지원할 것을 약속했고, 러시아는 영국에 대항하여 대륙 봉쇄령에 참여하기로 동의했다. 러시아는 또한 조약에 따라 라인 연방을 인정하기로 동의했다.[12]

2. 3.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과 해방 전쟁

나폴레옹의 팽창 정책은 유럽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대륙봉쇄령을 통해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영국과의 교역에 의존하던 대륙 각국의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13]

1808년,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실의 내분을 틈타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에 기반한 스페인 국민들의 격렬한 게릴라 저항에 직면했고, 영국이 이들을 지원하면서 프랑스는 이베리아반도에 상당한 병력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1809년, 오스트리아는 다시 프랑스에 대항했으나, 바그람 전투에서 패배하고 빈이 점령당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 마리 루이즈와 강제로 결혼하여 오스트리아를 견제하려 했다.

1812년, 러시아스웨덴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재개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러시아의 초토화와 혹독한 추위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퇴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스몰렌스크, 모스크바 등의 전투가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유럽 각국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폰 슈타인 남작,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와 같은 인물들이 비밀리에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다. 나폴레옹의 형제자매와 장관들 사이에서도 배신이 잇따랐으며, 징병에 대한 반감과 대륙 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은 민중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2. 4. 프랑스 제국의 종식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는 프랑스 제1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초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점령 후 러시아가 항복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러시아인들 사이에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이는 빗나갔다. 러시아인들은 조국 수호를 외치며 저항했고, 알렉산드르 1세는 반나폴레옹의 상징으로 떠올랐다.[13] 러시아군의 강력한 저항과 농민들의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1812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프랑스군은 굶주림과 추위, 러시아군과 농민 게릴라의 공격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12월에는 파리에서 쿠데타 미수 사건까지 발생하자, 나폴레옹은 병사들을 버려둔 채 파리로 돌아갔다.

러시아 원정 실패는 나폴레옹 정권의 기반을 흔들었다. 프랑스 내에서는 정권에 대한 반발과 징병 거부가 잇따랐다. 그럼에도 나폴레옹은 1813년 여름 군대를 재편하여 드레스덴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휴전 협상 과정에서 연합군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주었고, 오스트리아마저 적으로 돌리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1813)에서 프랑스군은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연합군에게 대패했고, 이는 제국의 결정적인 몰락으로 이어졌다. 라인 연방을 비롯한 라인 강 동부의 프랑스 제국 영토가 붕괴되었다.

1814년 파리 침공전에서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기만 작전에 속아 파리 함락을 허용했다. 프랑스 제국 의회와 휘하 장군들은 나폴레옹에게 퇴위를 요구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4일 퇴위 문서에 서명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되었다.

나폴레옹 퇴위 후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가 즉위하면서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러나 루이 18세는 혁명 이후의 프랑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체제 부활을 시도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한편, 유럽 열강은 빈 회의를 열어 전후 유럽 질서를 논의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대립하여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나폴레옹은 1815년 엘바 섬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상륙했다.

나폴레옹은 과거 부하 장군들을 다시 소집하고, 루이 18세에게 실망한 파리 시민과 병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입성했다. 이에 경악한 유럽 열강은 다시 나폴레옹에 대항하기로 결의하고,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다. 연합군은 벨기에, 라인 방면, 북이탈리아에 군대를 배치하여 나폴레옹을 포위했다. 나폴레옹은 벨기에 방면으로 진격하여 영국-프로이센 연합군과 대치했다. 워털루 전투(1815)에서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은 끈질기게 프랑스군에 저항하며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결국 프로이센군이 합류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나폴레옹은 대패하여 파리로 도주했다. 나폴레옹은 다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대서양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면서 프랑스 제1제국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3. 나폴레옹의 통치



180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황제로 즉위하여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그는 부르봉 왕조가 아닌 로마 제국과 샤를 대제의 후계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랭스 대성당 대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호화로운 대관식을 거행했다.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에게 황제관을 씌워주는 대신 축복기도를 하는 역할에 그쳤다.[12]

나폴레옹 1세는 파리를 세계 최고의 수도로 만들기 위해 도시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 새로운 주소 체계, 분수, 묘지, 광장, 시장, 공공 시설 등을 정비하고 위인들의 동상을 세웠다.

나폴레옹은 군사적 성공을 통해 제국을 확장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승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라인 동맹을 성립시켰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를 굴복시켜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바르샤바 공국을 수립하고 프로이센의 영토를 축소시켰다.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와 프랑스 간의 동맹을 시작했지만, 유럽의 나머지 국가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12]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1807년 7월 틸지트에서 만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반도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쇤브룬 조약을 통해 일리리아 지방을 합병했지만, 제국 내에서는 여러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영사 정부와 이후 제국의 조직도

3. 1. 나폴레옹 법전

나폴레옹 법전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들의 공통된 우려 사항에 호소하여 지지를 얻었다. 여기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친 망명 귀족에 대한 반감, 일부의 ''앙시앵 레짐'' 복귀에 대한 두려움, 혁명을 되돌리려 했던 외국에 대한 혐오와 의심,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적 이상을 확대하려는 자코뱅의 열망 등이 포함되었다.[14]

나폴레옹은 권력과 제국의 지위를 얻어 프랑스 제도의 변화에 대한 지지를 모았다. 그 예로, 1801년의 정교 조약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를 다수 종교로 확정하고 일부 민사적 지위를 회복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시기에 스스로를 계몽 군주로 생각했다. 그는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면서 혁명의 수많은 사회적 성과를 보존했다. 그는 효율성과 힘을 숭배했으며 봉건주의, 종교적 편협함, 시민 불평등을 혐오했다.[14]

혁명 초기에 실용주의적 이유로 급진 정치 자코뱅을 지지했지만, 나폴레옹은 정치 경력이 진행되면서 점점 더 독재적으로 변해갔다. 권력을 잡은 후에는 공교육, 프랑스 법률 시스템의 전반적인 자유주의적 재구조화, 유대인 해방 등 자유주의와 권위주의의 특정 측면을 모두 수용했다. 반면 선거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는 거부했다.

3. 2. 종교 정책

나폴레옹은 1801년의 정교 조약을 통해 프랑스 가톨릭 교회를 다수 종교로 확정하고 일부 민사적 지위를 회복시켜 프랑스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했다.[14]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시기에 스스로를 계몽 군주로 생각했으며, 효율성과 힘을 숭배하고 봉건주의, 종교적 편협함, 시민 불평등을 혐오했다.[14]

3. 3. 제국의 행정 구역

나폴레옹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 제1제국은 행정 구역을 개편하여 효율성을 높였다. 1801년 프랑스 영사정부 시기에는 프랑스 본토에 98개의 데파르트망이 있었으나, 제국이 확장하면서 그 수가 늘어났다.

1812년 제국의 절정기에는 프랑스 본토에 130개의 데파르트망이 설치되었고, 함부르크를 포함한 제국 직할 행정 구역에는 추가로 15개의 데파르트망이 더 있었다.[1] 이는 러시아 원정 이전 프랑스 제국의 최대 영토를 보여준다.[1]

4. 역대 황제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Motto of France https://frenchmoment[...] 2020-05-21
[2] 논문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https://escholarship[...] 2021-08-20
[3] 웹사이트 Decree upon the Term, French Republic https://www.napoleon[...] 2022-03-30
[4] 웹사이트 Bulletin des lois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https://gallica.bnf.[...] 2019-08-23
[5] 웹사이트 The Proclamation of Empire by the Sénat Conservateur http://www.napoleon.[...] Fondation Napoléon 2014-08-15
[6] 백과사전 Battle of Austerlitz https://www.britanni[...] 2014-08-15
[7] 웹사이트 Napoleonic Wars: Battle of Friedland http://militaryhisto[...] about.com 2014-08-15
[8] 서적 Napoleon Bonaparte and the Legacy of the French Revolution https://books.google[...] Bloomsbury
[9] 서적 The History of France https://archive.org/[...] Greenwood Press
[10] 서적 The encyclopedia of the French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Volume 1 ABC-CLIO 2006
[11] 문서 Bulletin des Lois
[12] 웹사이트 Treaties of Tilsit https://www.oxfordre[...] 2024-09-22
[13] 웹사이트 The Frankfort Declaration http://www.napoleon-[...] napoleon-series.org 1813-12-01
[14] 논문 Violence and the revolutionary and Napoleonic wars: massacre, conquest and the imperial enterprise.
[15] 논문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https://escholarship[...] 2021-08-20
[16] 웹인용 National Motto of France https://frenchmo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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